심심해서 인종실록을 읽다가 즉위 첫해 1월 6일자에 이런 기사를 발견했다.
인용 시작
우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찬성 이기(李芑), 우찬성 성세창(成世昌), 좌참찬 권벌(權橃), 병조 판서 정옥형(丁玉亨), 예조 판서 임권(任權), 호조 판서 임백령(林百齡), 예조 참판 정만종(鄭萬鍾), 병조 참판 신영(申瑛), 형조 참판 윤개(尹漑), 공조 참판 강현(姜顯), 동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이 명을 받고 예궐하니, 전교하기를,
“대행 대왕의 묘호를 보고 내 생각에도, 상사(商史)에 은(殷)나라의 도를 부흥시겼으므로 중종(中宗)이라 호칭하였다는 말이 있다 하여 조정이 이에 의거하여 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미 계하(啓下)하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하건대 부왕(父王)께서 폐조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反正)하고 종사를 40년 동안 또 편안하게 하셨으니, 중흥시킨 공이 작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조(祖)라 칭하고자 하는데 첨의(僉意)34) 가 어떠한가? 중(中)자가 중흥의 뜻이라고는 하나 또한 흡족하지 못한 듯하니, 세조(世祖)의 예(例)에 견주어 종(宗)자를 고치고자 한다.”
하였다. 윤인경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다시 함께 상의하였으나, 조(祖)자 위에는 달리 알맞은 글자가 없고 세(世)자가 있을 뿐인데 이미 세조의 묘호가 있으니 합당한 자가 전혀 없습니다. 또 역대의 임금 중에 특별히 조자로 칭한 경우가 없으며 조는 공이 있는 것이고 종은 덕이 있는 것이니, 종자가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위에서도 《상서(尙書)》 무일편(無逸篇)에서 보신 바와 같이 은 중종(殷中宗)의 일이 바로 대행 대왕의 일과 서로 같았기 때문에 이 호를 의논해 올린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무일편의 은 중종에 대한 일에 부표(付標)하여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졸곡(卒哭)뒤에 백립(白笠)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이제 육조(六曹)와 함께 회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조는 공이 있고 종은 덕이 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나, 부왕께서는 공과 덕을 다 갖춘 가운데에서도 그 공이 크시니 은 중종과 덕은 서로 같을지라도 공은 현격히 다르다. 어찌하여 조자 위에 알맞은 자가 없다 하는가. 나는 조호(祖號)로 칭하여 올리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백립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인경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남송 고종(南宋高宗)의 호를 정할 때 홍매(洪邁)가 조로 칭하고자 하였으나 우무(尤袤)가 ‘한 광무(漢光武)는 장사정왕(長沙定王)35) 의 후손으로서 들어가 대통(大統)을 이었으므로 조로 칭하였으나, 고종은 중흥하였어도 휘종(徽宗)의 아들로서 바로 대통을 이어받았으므로 조로 칭할 것은 없다.’ 하여 마침내 고종이라 칭하게 된 것입니다. 신들이 상의 분부를 다시 받고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았습니다만, 세조를 조로 칭한 것은 아우로서 형을 이었기 때문인데 대행 대왕께서는 중흥하였어도 바로 성종(成宗)의 계통을 이었으니 조로 칭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인경이 또 이기·성세창·권벌·정순붕·정옥형·임권·임백령과 함께 백립에 대한 일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전에 성묘(成廟)36) 때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상(喪)을 당하여 신하를 모아 이 일에 대해 의논하였습니다. 그때 서거정(徐居正)·이파(李坡)·유순(柳洵)·김종직(金宗直)·정성근(鄭誠謹) 같은 무리는 다 한때의 이름 있는 선비였는데, 그들의 의논이 다 흑립(黑笠)을 따랐으므로 성종께서 또 정례(情禮)를 참작하여 전지(傳旨)를 내리셨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선왕 때에 이미 정해진 제도를 이제 와서 고칠 수 없으니 흑립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고, 이어 성종 때의 의득(議得)과 전지를 써서 아뢰었다. 강현·정만종·윤개·심연원(沈連源)·신영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예문(禮文)에 ‘졸곡 뒤에 갓[笠]은 흰 것을 쓴다.’ 한 데에는 반드시 의거한 것이 있을 것인데 이렇게 만든 뜻을 구명하지 않고 경솔히 고쳐 정한 것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한 일입니다. 성묘 때에 한때의 의논에 따라 고쳤다 하더라도 그때의 전교에 ‘경솔히 감쇄(減殺)하여 흉(凶)을 바꾸어 길(吉)을 따르는 것은 마음에 미안하다.’고 하셨으니, 이것으로도 성묘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위에서는 익선관(翼善冠)에 오서대(烏犀帶)를 하고 아래에서는 오사모(烏紗帽)에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오로지 신하들에게 임하여 함께 관사(官事)를 처리함에 있어 순흉(純凶)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가하게 사사로이 있을 때에도 백립을 벗는다면, 선왕의 제례(制禮)를 어길 뿐더러 참으로 대상(大喪)의 정문(情文)에도 맞지 않는 데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부왕께서는 성종의 계통을 이으셨다 해도 그 사이에 폐왕(廢王)37) 이 재위하였으므로 세조와 문종(文宗) 사이에 노산(魯山)38) 이 재위한 일과 서로 다르지 않을 듯한데, 어찌하여 유독 조호(祖號)를 칭해 올릴 수 없단 말인가? 또 송 고종의 일과는 견주어 논할 수 없으니 내 뜻을 따르기 바란다. 그리고 백립에 대한 일은, 성종께서 전교하신 뜻이 우상(右相) 등의 뜻과 서로 맞기는 하나 참판 등의 뜻도 예문과 맞는다. 상제(喪制)의 대례(大禮)는 경솔히 정하기 어려울 듯하니, 내일 성종 때의 전례에 따라 대간·홍문관이 함께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인용 끝
졸곡하고 백립쓰는 얘기는 별 관계 없고... 단지, 신하들이 백립 얘기하는데 계속 묘호에 집착하는 임금의 모습이 재미있다.
宗과 祖의 기준이 무엇인가로 얘기가 많았는데, 위에 따르면 세 가지 고려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공이 많으냐 덕이 많으냐.
2. 어울리는 글자로 앞에 올 만한 것이 있느냐.
3.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느냐 아니냐.
인종이 똑같이 반정한 세조는 왜 조 시켜주고 부왕은 안 시켜 주느냐고 하는데서 이 기사는 끝난다. 며칠 뒤의 기사를 보면 신하들이 노산(단종)과 폐왕(연산)은 왕에서 군으로 강봉되었으니 둘 다 무효고, 그렇게 치면 세조는 형인 문종에게서 받은 것이고 선왕은 아버지인 성종을 이은 것이니 경우가 다르다는 주장을 한다. 인종은 아버지가 나라를 중흥(반정을 좋게 부르는 말인 듯하다. 중종의 中은 여기서 온 것이다)시킨 공이 커서 祖자를 붙이고 싶었다고 입장을 정리한 뒤, 신하들의 말에 승복한다.